생명보다 돈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사라질 때, 촬영 현장의 동물도 안전해지겠죠. 긴 싸움이 될 겁니다.
방은진 배우 겸 감독(이하 ‘방은진 감독’)의 커리어는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의 목록으로써도 특별하지만, 중요한 순간 늘 동물이 함께했다는 점에서 또 각별합니다. 배우 방은진에게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여우주연상 다관왕을 안긴 영화 〈삼공일 삼공이〉(박철수)에서 방은진 감독은 현장에서 소품으로 취급받던 강아지를 구조했습니다. 한참 뒤 연을 맺은 반려견 라마는 방은진 감독의 촬영 현장에 함께하며 첫 장편 연출작 〈오로라 공주〉(방은진)에 출연하기도 했지요. 바로 그 동물들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방은진 감독이 반려견 샘과 함께 동물권행동 카라를 만났습니다.
독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를 만들고 때때로 배우도 하는 방은진입니다. 동물권행동 카라의 후원인입니다. 이전에 임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카라 영상인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선뜻 함께하시게 되었나요?
촬영 현장의 동물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늘 유념하고 관심 가져왔기 때문에 불러주셔서 감사했죠. 너무 예의 차린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사실 현장에 있은 지 좀 되어서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긴 했어요.
90년대부터 배우로, 또 2000년대부터는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셨잖아요. 장기적 관점에서 귀한 말씀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사실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아요. 동물권 운동 시작하고 나서 법제화되기까지도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그게 실제 작동하기까지 또 한참 걸릴 거라고 봐요. 그래서 예전 이야기도 아직 유효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때는 동물이 소품이었죠
예전 촬영 현장은 지금보다 열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물과의 촬영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굉장히 오래전 일인데요. 그렇지만 아직 유효한 얘기일 수 있어요. 우리는 저변이 확대되면 사람들의 인식이나 문화도 같이 진보할 거라고 막연히 기대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제가 첫 주연을 맡았던 〈삼공일 삼공이〉(박철수 감독)라는 영화가 1995년에 나왔어요. 거식증에 걸린 여자랑 폭식증에 걸린 여자가 이웃으로 나오는 페미니즘 계열의 그로테스크한 영화였어요.
*이 문단엔 잔혹한 영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맡았던 역할이 남편에게 애정을 갈구하다가,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반려견을 요리해서 이혼당하는 여자였어요. 영화 속에서 냄비 뚜껑을 열면 드러나는 반려견은 모란 시장에서 구해왔던 것 같고, 살아있는 반려견 역할로 출연하는 개를 제작실장님이 충무로에서 사 왔습니다.
대우도 소품 같았겠네요.
사람도 촬영 현장에 24시간 있으면 힘들어요. 먼지 많지, 조명은 뜨겁지. 근데 어린 강아지는 오죽하겠어요. 더구나 사람 위주로 찍다가 필요할 때만 케이지에서 꺼내오는데, 개가 말을 들을 리가 없죠. 처음엔 몰랐는데, 촬영이 끝나면 누군가 돌봐주는 게 아니라 개를 촬영 현장에 두고 갔던 거예요. 근데 애가 점점 비실비실해졌어요. 그러니까 누가 개를 교체해야겠다고, 그렇게 표현하더라고요. 마치 마트에서 불량품 교환하듯이. 영화 촬영이 끝날 무렵 그 개가 폐렴에 걸렸단 걸 알았어요. “그러면 얘는 어떻게 돼요?”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너무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당시에 대학 졸업하고 혼자 나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개를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죠. 개는 누군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게다가 전 배우니까 집에 있는 시간도 불규칙했거든요. 하지만 버려질 운명의 그 아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난한 연극배우고 뭐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어요. 병원에 데려갔지요. 3개월간 폐렴 치료를 시키고, 그 개를 키우게 되었죠. 29년 전 얘기예요.
촬영장에서 만난 개가 반려견이 되었군요.
네, 생각해 보니 영화배우 데뷔작에도 개가 나왔고, 영화 연출 데뷔작에도 개가 나왔네요. 연출작 〈오로라 공주〉(2005)에는 제 반려견 ‘라마’가 나왔어요. 주인공 정순정(엄정화 역)이 살인을 저지른 뒤의 장면이에요. 그 옆에 차가 한 대 서는데 개가 뭔가 수상하다는 듯이 짖는 장면을 하나 넣었어요. 평소에도 영화 촬영장에 라마가 함께 다니곤 했거든요. 그래서 라마에게 그 짖는 역할을 시키려고 했는데 얘는 원래 안 짖는 개예요. 훈련사분께 부탁해서 짖는 훈련을 했죠. 안 짖기 훈련을 하면 짖는 것도 되거든요. 그런데 막상 촬영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어요. 조명에, 카메라에, 스태프들에 얼마나 낯설고 무서웠을까요? 저만 찾는 거예요. 목도 쉬었던 것 같아요. 그때 경험했죠. 동물출연의 난이도를요. 그 뒤로 저는 절대 제 반려견 식구 출연 안 시켰습니다.
말을 못 하는 아역배우 같은
현장에서 동물은 어떻게 촬영해야 할까요?
제가 다른 동물은 잘 모르지만 개는 말 못 하는 아이라고 생각해요. 의사 표현을 못 하잖아요. ‘나는 이걸 하기 싫다’라는 표현을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상태나 욕구를 가이드라인이든 뭐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현장에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학대 수준의 문제를 경험하기 너무 쉬운 존재인 거죠.
그런데, 그럼 말하는 아이들, 아역 배우는 어떨까요? 사실 아역 배우들이 보호자 입회하에 안전하게 촬영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었어요. 해리포터 같은 사례를 보니까 수년간 아이들이 주연으로 촬영하니까 아예 촬영장 안에 학교가 있고 교육권, 기본권을 지킬 수 있더라고요. 우리나라는 그렇게는 못 하지만 촬영 현장에서도 아이들을 찍을 때는 어느 정도 기다려줘야 할 걸 각오해요. 성인 배우들이 아이의 컨디션을 배려해 미리 찍기도 하고요. 그런데 동물은 우리가 기다리나? 안 기다리죠. 그런 생각 자체를 못 하죠.
그래서 사실은 동물이 주인공인 경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경우에는 보통 한 마리를 연기하기 위해 여러 동물 배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즘엔 CG로 얼굴만 똑같아 보이게 통일하기도 하고요.
아동 배우들 권리도 보장된 지 얼마 안 되었군요. 그래도 현장이 바뀌었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법들이 모든 돌발상황을 커버하진 못해요. 그러니까 동물 촬영의 경우에도 현장 가이드라인이 생긴다 해도 그게 실제 현장에 활용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계속 보완되고 개선되려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해야 합니다.
돈의 문제, 시간의 문제, 창작자 권리의 문제
현장이 그토록 변화하기 힘든 이유가 뭘까요?
시간이죠. 현장에서는 시간이 다 비용이니까. 개는 그나마 교육과 훈련이 되는데 고양이는 더 찍기 어렵겠지요. 촬영 현장이라는 곳이 좀 특수한 게 분명히 있어요. 전 꼭 바뀌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배우가 몸 안사리고 직접 연기하는 걸 추켜올려 세우고 기대하는 문화라고 생각해요. 10년 전 20년 전 기사 한 번 검색해보세요. 대역이나 스턴트 쓰지 않고 대단한 연기를 했다는 식의 기사 많이 나와요. 그게 정말 위험천만한 얘기거든요. 배우는 직접 운전하는 장면도 찍으면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촬영할 수 있을지 현장에서 더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 배우도, 동물 배우도 다 생명이잖아요. 비용 아깝다고 CG 안 쓰려고 하고, 사람 안전보다 돈을 우선에 두는데, 현장에서 동물의 안전을 고민한다? 대단히 드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카라가 창작자들에게 어떻게 이 미디어 동물권 운동을 호소해야 할지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촬영 현장에서의 성폭력 예방 교육이 의무화된 것도 사실 ‘여성 영화인 모임’에서 목소리 내면서 ‘성평등센터 든든’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권 문제도 알음알음 알리는 걸 넘어서, 감독 조합, 촬영 감독 조합 같은 ‘유니온’들과 함께 해야 할 거고, 그러려면 동물권과 나머지 권리를 분리해서 말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 과정은 굉장히 오래 걸릴 거예요.
다 연결된다는 건 즉, 개와 고양이의 출연 장면을 촬영하는 것도 똑같은 자본의 맥락이라는 뜻이죠. 사전에 얼마나 변수를 예상하고, 준비하고, 또 촬영이 어려운 부분은 예산 들여서 CG로 대체할 것인지 같은 게 동물권 문제뿐 아니라 현장 자본의 논리랑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앞으로 많이 변할 거로 생각해요. 광고를 보면 알아요. 어느 순간 광고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가정에는 꼭 개가 포함되어 있어요. 고양이는 좀 젊은 세대들을 보여줄 때 많이 등장하는 것 같고요. 반려 가족의 수 자체가 많이 늘어난 것도 중요하고,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호감의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하죠.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말씀 듣다 보니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함께 변화해야 할 지점들도 많고요.
흔히 한국사회가 양극화되었고 불평등이 심하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동물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예컨대 투견이랑 어느 부자집 가족의 개가 동등한 개라고 할 수 있나요? 그들 사이에 신분이 없나요? 교묘하게 존재한다는 거죠.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을 구분 짓고 차별하며 보는 관점이 인간과 반려로 사는 동물들의 세계에도 투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사실 다 알고 있어요. 인간과 동물이 종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별의 문제에선 분리할 수 없다는 거죠. 우리가 평등한 세상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동물은 집에서 잘 보호받으며 지내고, 어떤 동물은 촬영 현장에서 학대당해요. 촬영 현장에도 예컨대 어디 뭐, 서양의 몇 대 손 품종견이고, 주인이 귀족의 후손이고 그러면 개거 사람보다 더 대우받을 수도 있죠. 하지만 만약에 사냥개였는데 방치됐다가 구조됐다? 그러면 대우가 어떻겠어요.
어떤 생명이든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가 있으면 동물도 당연히 보호받을 텐데요. 29년 전에 감독님이 ‘동물권’이란 단어 없이도 촬영 현장의 개를 입양하셨던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동물과 어떻게 관계 맺으시는지 궁금해요. 오늘 함께 인터뷰 현장에 온 강아지 샘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샘은 사냥개였어요. 가수 장필순 씨를 통해서 제주도에 방치된 샘을 알게 되었어요. 제주도에 수렵할 수 있는 지역이 있어요. 샘은 거기서 누군가의 사냥개로, 도구로 쓰였고 5년간 어느 산의 창고에 방치되어 갇혀있었어요. 그런 아이를 제주의 한 개인 구조자분께서 발견하셨고 병원에 데려가곤 했다고 하더라고요. 대형견이라 그런지 9개월 넘게 임시 보호로 나서는 분이 안 계셨대요. 사실 당시 저는 제 반려견이 갑작스레 돌연사한 지 얼마 안 되어 극심한 슬픔 중이었는데 용기를 내어 한번 샘을 보러 갔어요. 제주도에서 제가 일주일 정도 함께 있었어요. 샘이 저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샘에게는 샘의 삶, 샘의 역사가 있으니까.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근육이 유착된 곳도 있고요. 아마 3년간 스테로이드 맞아가며 사냥을 반복한 게 아닌가 싶어요. 마음이 너무 아픈 이야기죠. 그런데 샘이 너무나 저를 잘 받아들여 주었어요. 다른 동물들도 정말 잘 존중해주고요. 그래서 다행히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낯선 스튜디오인데 샘은 편안해보여요.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기 획 | 동물권행동 카라, 오늘의풍경
에디터 | 백희원
디자인 | 신인아, 김헵시바
사 진 | 임효진